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리의 성모 (문단 편집) == 2번째 발현: 기적의 메달 == [[파일:external/myriamir.files.wordpress.com/mc3a9daille-27-nov-1830.jpg|width=300]] 첫 발현이 있고 넉 달이 지나 1830년 11월 27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무렵이었다. [[나자렛의 성 요셉]]의 상본을 모신 곳 부근에 있던 [[주교]]좌(主敎座)에서 첫 발현 때 들었던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난 뒤, 새하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성모는 작은 금빛 십자가가 꼭대기에 달린 금빛 [[지구]]를 손에 들었고, 양쪽 손가락에는 [[반지]] 3개가 끼워져 있었는데 반지들에선 눈부신 빛들이 반짝였다. 또 하얀 지구의 위에 서 있었고, 발밑에는 금빛 반점(斑點)이 있는 초록빛 [[뱀]]이 있었다. 성모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카타리나 수녀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보고 있는 이 둥근 [[지구]]는 전 세계, 특히 [[프랑스]]를,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나타내고 있단다. 이 빛들은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쏟아부어 주는 은총을 상징한단다.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 [[보석]]은 영혼들이 간청하고 있는 것을 잊고 있는 은총이란다. 성모의 손에 있던 금빛 지구가 사라지고, 양손에서 어머니의 배려하는 마음 같은 모습이 넓게 펼쳐졌다. 성모가 손가락에 긴 반지의 보석에서 발 아래 있었던 지구 위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알처럼 둥근 테두리가 성모의 주위를 둘러쌌는데, 그 안쪽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금빛 글자가 있었다. >이 모형으로 [[메달]]을 만들거라. 그 메달을 몸에 거는 사람들 모두에게 은총이 내려지리라. 메달은 목에 걸면 된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메달을 거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많으리라. 성모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그 그림이 뒤집혀져서 뒤쪽이 나타났다. 커다란 M 글자 위에 옆쪽 막대기가 있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M 글자 아래에는 [[예수]] 성심(聖心)과 [[성모]] 성심을 상징하는 심장 두 개가 있었다. 예수 성심은 가시관으로 둘러쌓였고 성모 성심은 칼로 꿰찔렸으며, 별 열두 개가 전체를 둘렀다. 환시는 이것으로 끝났다. 카타리나 수녀는 젊은 고해사제 알라델 신부에게 [[성모 발현]]과 메달 주조(鑄造)에 관해 전달했지만, 신부는 수녀의 상상이리라고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카타리나 수녀는 신부의 반응을 성모에게 전하자, 성모는 기다리라고 답하였다. >때가 온다면, 그는 내가 희망하는 대로 따르게 되리라. 그는 나의 종이니 그를 슬퍼하게 해서는 안 된단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을 입어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태어났다(무염시태無染始胎)는 신심은 있었지만, 아직 정식 교리는 아니었다. 1859년 교황 [[비오 9세]]가 무염시태의 교리를 정식으로 선포하기 전까지, 무염시태는 신자 개개인이 믿을 수는 있으되 믿지 않아도 무방한 영역이었다. 아직 정식 교리가 아닌 내용을 무명 수녀가 받았다는 사적 계시에 근거하여 메달에 표현하여 대중에게 퍼트리려니, 설령 해당 사적 계시가 진실되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알라델 신부가 메달 제작에 미적거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카타리나 수녀의 인내심이 결실을 맺었다. 드디어 알라델 신부는 동료 에티엔 신부를 매개로, 당시 파리 대주교 드 켈렝(Hyacinthe-Louis de Quélen) 몬시뇰에게 메달을 주조하고 신자들에게 퍼트려도 된다는 허락을 얻기 위해 움직였다. [[대주교]]는 발현 중에 메달 주조를 요청한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에 관해, 교회의 신앙이나 신자들의 신심과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주교는 주조를 인준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메달을 걸어보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대주교는 개인적으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Immaculata Conceptio)' 신심이 매우 독실했다고 전한다. 원죄 없으신 잉태의 메달 주조를 곧바로 인준했음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요청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1832년 6월 30일, '원죄 없으신 잉태의 메달' 2천 개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는 알라델 신부로부터 이 메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것을 퍼뜨려야 합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처음으로 주조된 메달을 몇 개 갖고 있었다. 그 중 10개는 파리 [[http://vincentdc.or.kr|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본원의 보관창고에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메달 보급은 급속한 성과를 거두면서 메달 그 자체가 기적이 되어갔고, 4년 후인 1836년까지 200만 개가 주조되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1839년 9월 9일, 북경교구에서 [[조선]]을 분리시켜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교구]]를 설정한 교황.]는 메달을 책상 위 십자가 아래에 두기도 했다. 이 메달이 이룬 기적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라델 신부가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이 신성한 메달로 인해서 모든 환자들이 치유됐고, 다양한 사람들의 회개와 전쟁, 사고 등에서의 보호가 일어났다. 이 기적들에 의해 메달은 곧바로 초창기 무렵부터 정식 명칭 '원죄없으신 잉태의 메달'이 아니라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며 신자들에게 매우 인기를 얻었고, 전세계 가톨릭 교회에 빠르게 퍼졌다. 메달이 이처럼 빨리 확산됨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메달이 일으킨 기적들이 더 신비했기 때문이다. 이 메달은 [[묵주기도]]의 위력에 필적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준성사써 [[가톨릭]] 신앙을 믿는 곳곳에 커다란 충격을 불러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